당나라의 장거리 원정과 삼국의 실제 위치에 대한 열린 탐구
우리는 종종 과거의 거대한 사건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곤 합니다. 예를 들어, 7세기 당나라가 현재의 중국 대륙에서 출발해 한반도에 있던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렸다는 주장은 그저 ‘사실’로 여겨지지요. 하지만 정말로 그 시나리오가 물리적, 지리적, 군사적, 기후적으로 가능했을까요?
1. 전제된 의문: 7세기 당나라 원정의 물류 가능성과 해상 전력
1950년 12월 겨울,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한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들은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화석 연료를 사용한 차량과 선진 무기를 동원했음에도 장거리 보급과 계절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이유 하나만이 그들의 진격을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만, 다수의 전쟁 평론가들은 보급선의 비효율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석유도 없고 기계 동력도 없던 7세기에 당나라가 어떻게 수만 명의 병력을 바다를 건너 파병하고,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 작전 성공을 이뤄냈을까요?
선박 한 척에 100명에서 200명밖에 실을 수 없었다면 13만 명 규모의 병력을 나르기 위해선 단순 계산으로 수백 척이 몇 차례나 왕복해야 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모든 게 바람과 조류에 의존해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비교가 있습니다. 1천 년 후 명나라 정화(鄭和)의 해상 원정을 보면, 당시 중국 조정이 수백 척에 달하는 대형 선단을 조직해 동남아와 인도, 아라비아까지 항해했습니다. 이 정화 함대의 선박은 길이 120m 이상에 수백 명을 태울 수 있었고, 항해에는 천문, 조류, 바람 등을 정교하게 계산하는 기술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정화의 원정은 “한 번의 국가 대작전”이었고, 반복 수행에 따른 비용 문제로 몇 차례를 끝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정화의 해상 원정조차 그랬는데, 과연 당나라는 이를 훨씬 앞서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당나라의 해상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물론 고구려와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가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해상 전력이 발해만의 해안지역을 따라 한반도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더욱 더 시간과 자원이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요?
2. 지명 중첩 현상과 문화적 이동의 단서
우리는 현대 미국에서도 영국의 York → 미국 동부의 New York, 영국의 London → 미국의 New London, Bellevue(프랑스) → Bellevue(미국 여러 곳), Sierra Nevada(스페인) → Sierra Nevada(미국) 등, 이주민이 익숙한 지명을 새 터전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사례를 무수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중국식 지명들—예를 들면 경주, 나주, 남산, 월성, 계림, 광주, 토산(토함산) 등—이 단지 조선시대 일부 유학자들의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명명일 뿐일까요?
중국 동남부, 특히 안후이성 남부와 강서성, 광동성 일대에는 현재도 삼국과 관련된 지명과 매우 유사하거나 동일한 지명이 존재합니다. 이 중첩은 단순한 우연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들이 대륙에서 패퇴하며 한반도로 이동하며 과거를 기억하며 예전에 지배했던 장소를 기리며 그 지명들을 다시 붙인 것일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이는 삼국의 본래 위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대륙 깊숙이 있었고, 후에 이동한 유민들에 의해 “지명의 재이식”이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3. 물소, 그리고 생태적 단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옵니다.
“신라는 수천 마리의 물소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고 풀을 뜯어먹는 물소가 흔한 나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경상북도 경주는 한반도 동남부의 험준한 산악지대입니다. 겨울이 춥고, 따뜻한 강물이 흐르는 환경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낙동강 일대까지 확장하여도 과거 물소가 대규모로 서식했다는 생태학적, 고고학적 증거도 찾기 어렵습니다.
반면, 만약 고대 신라의 위치가 중국 안휘성 남부나 광동성 일대로 추정된다면, 그곳은 아열대 기후로 물소 서식에 매우 적합한 지역입니다. 실제로 현재도 다수의 물소가 서식하고 있지요.
이 기록은 단순히 허구일까요, 아니면 신라의 실제 위치를 반증하는 생태적 단서일까요?
4. 동이 열전과 사서 속 국경선
중국 정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는 모두 ‘동이(東夷)’로 기록됩니다. 어떤 학자들은 ‘왜(倭)’가 양자강 이남, 남월(南越)·회계(會稽) 등지의 담이(儋耳) 지역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한 사서에서는 각 시기의 국경선이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 주나라와 조선의 경계: 하남성 서화
- 연나라와 조선: 요동 태행산맥
- 진나라와 북부여: 은산 서쪽 장성
- 한나라와 마한: 요동
- 북위와 백제: 요서 진평 이군
- 당과 백제·서신라: 강서성 덕안, 항성, 석문 등
이러한 기록들은 삼국이 반드시 지금의 한반도 내에 국한되었을 필요가 없음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소위 “동이족”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정사라고 밝힌 역사서에서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북위와 백제의 전투: 가능했는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사초》, 중국 《25사 동이열전》에는 서기 488년경 백제가 북위와 충돌하여 요서를 점령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백제가 지금의 한반도 서남부에 있었다면, 북위(현 북경 중심의 화북 지역)와 물리적 전쟁을 벌이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백제는 근초고왕 때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당시는 기원 후 350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그 강성했던 시기에도 하지 못했던 대륙 경영을 1백년 후에???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견제를 받고 있었고, 요서까지 진출하려면 상당한 거리와 방해 세력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백제가 요서와 더 가까운 동중국 지역에 있었고, 후에 한반도로 이동했다면, 이러한 충돌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즉, 지리적 전제를 재구성하지 않으면, 이 전투 기록 자체가 설득력을 잃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6. 고고학적 공백, 숨겨진 역사?
일부는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을 고고학적 유물 출토지로 증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중국 동남부 지역은 지금까지 정치적·문화적 민감성으로 인해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이 어렵거나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공 정부에서 유물을 “파다 보니 너무 백제 혹은 신라의 기와, 화병, 생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이 지역이 화화족이 지배했었던 곳이라는 답이 안 나와 덮었다”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 유적은 브리튼(현재의 영국 섬), 히스페니아 (이베리아: 현재의 스페인) 등 제국이 떠난 땅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삼국 유산은 과연 대륙 어딘가에서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지 못하게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중국의 정치적 현실은 대규모 고고학 발굴이 제한되거나, 의도적으로 과거를 지우는 작업이 진행되어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고학은 발견되지 않은 것을 ‘없다’고 단정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직 묻혀 있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거나, 혹은 감춰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7. 끝나지 않는 질문들
- 당나라가 정말 13만 병력을 바다 건너 보급하고 작전을 수행했을까?
- 삼국의 위치는 정말 오늘날의 한반도 안에 국한되었을까?
- 우리가 믿는 ‘통설’은 과연 모든 역사적 증거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이 글은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을 위한 글입니다.
당나라의 침공, 물소가 넘쳐나던 신라, 북위와의 전쟁, 그리고 반복되는 지명들. 이 모든 조각들이 말하는 진실은 단 하나의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거대한 퍼즐을 이뤄가는 중간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일, 그 자체가 역사를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역사란 늘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해석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질문할 자유가 있으며, 해석의 폭을 넓힐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종종 정답만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사 자체와 그 역사의 해석은 공정해야 하며 어느 누군가가 소유를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힘이 있다고, 현재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여, 과거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오만은 나중에 그들의 힘이 약해졌을 때, 더 강성한 집단이 그들의 과거를 송두리째 갈아 엎을 때가 온다면 더 강한 집단의 횡포를 방어할 논리가 전무할 것입니다. 그 때 가서 지금의 전횡을 후회하지 말고,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역사적 성인군자가 되는 길 아닐까 합니다.